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 (문단 편집) === 남북전쟁 이전 === [[파일:William-Tecumseh-Sherman.jpg|width=250]] [* 이 사진은 남북전쟁 이후 찍은 사진이고 팔에 단 검은 리본은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달았다.] 1820년 2월 8일 오하이오 주 랭커스터 시에서 성공한 오하이오주 대법원 [[판사]]인 찰스 로버트 셔먼[* 이 사람의 조상이 [[로저 셔먼]]이라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이 사람의 아들들, 즉 셔먼의 형제들도 성인이 돼서 다들 한 자리씩 해먹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을뿐 집안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다시피 이름이 상당히 특이해서 평생 이름을 댈 때마다 이목을 끌었다고 하는데, 셔먼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아메리카 원주민|원주민]] 족장처럼 강인해지라고 [[테쿰세]]의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9세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재혼한 어머니와 양부 토마스 어윙[* 미국 상원의원에 미국독립전쟁 배터랑인 조지 어윙의 자손으로 역시 정치적으로 대단한 가문이었다.] 밑에서 자랐다.[* 양부에게는 딸 엘리노어가 있었는데, 셔먼은 엘리노어를 사랑하게 되어 양부가 죽고나서 결혼하게 된다. 참고로 엘리노어는 셔먼보다 4살 연하였고 집안이 좋아서 교육도 많이 받았으며, 이 때문에 여성인권운동가이자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또한 연방 지지자이기도 했다. 셔먼은 아내와의 금슬이 매우 좋았고 아내도 남편이자 남매와 다름없던 셔먼을 끔찍하게 아껴서, 셔먼이 파면당하게 생기자 직접 링컨을 만나서 셔먼의 파면을 철회시키고 오히려 다시 전쟁터의 요직에 앉게 해줬다.]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해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나 [[병참]] 장교와 [[행정병|행정]] 역할이었기에 전투 경험이 없어 성과와 명성은 미미했다. 이후 [[소령]]으로 예편한 뒤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제대로 되는게 없었다. 그러다가 [[루이지애나]] 군사학교[*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으로 1860년에 부임해서 일하다 1861년에 루이지애나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바로 그만두고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잠시 철도회사일을 한다. 이후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연방 육군에 [[여단장]]으로 복귀하면서 그의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